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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기(남자의 입장, 약 4년)1일 1포스팅 잡설 2020. 12. 24. 01:36
*음악을 켜고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별하던 그날
2020년 7월 1일. 그 날은 유독 서늘했다. 시간을 갖자고 서로 합의한 뒤 교대역으로 가던 버스. 냉면집에서 먹던 차가운 육수. 그렇게 땀 많고 더위타는 나인데 땀이 안 났다. 메밀 순면은 어찌나 밍밍하던지.
그날 카페에서 헤어짐을 통보받고, '더 깔끔하게 헤어지기 위해' 자리를 옮기며 그동안의 기억을 추억했다. 첫 여행이던 속초, 월미도 놀이공원, 남산타워 산책 등. 돌이켜보니 참 즐거운 추억이 많더라.
어쩌다 이런 상황에 오게 된건지 알고싶었다. 여자 입장에서도 조금 마음이 풀렸을테니. 기다렸다는듯이 말이 튀어 나오더라.
'진실성이 없어 보인다'
'미래비전이 없어보인다'
'다른남자 만나보고 싶다'
요약: 정나미 다 떨어져서,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 앞에서는 누구라도 그랬을 걸. '오빠 정도면 괜찮아' 라며 격려하고 포용해주던 그 사람이 이렇게 나를 밀어내고 있다니. 애써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그 여자도 그 표정을 읽었던 것 같다. 전철타고 가야하는 그 여자를 배웅하려는데 이번에는 달랐으니까.
그 사람은 내가 가는 길을 보고싶어했다. 추적추적 비 오는 걸 알면서도. 본인도 감정이 이래저래 묘했겠지. 대학생활 내내 붙어있던 사람이 이렇게 끝나니까. 그걸 알기에 못이기는척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도착하고, 그녀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며 버스에 탔다. 그게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이별 직후
첫 한달간은 버틸 만 했다. 매일 밤 10시 30분에 전화하지 않아도 됐고, 생활비도 25%가량 줄어들었다. 이게바로 '개꿀' 아닌가. 순간순간 허전함이 닥쳐오긴 했지만 그런대로 버틸 만 했다.
그런데 그건 시작도 아니었다.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면서, 제대로 후폭풍이 찾아왔다. 옆구리가 시려지기 시작하는 가을. 평소같았으면 그 사람과 카페에서 맛있는 걸 먹고 여기저기 사진도 찍었을테다.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예쁜 추억/경험 만들고 있고. 그런데 나는 키보드 두드리며 작업이나 하고 있고, 내 옆에는 정말 아무도 없더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싶었다.
미친듯이 울고 좌절하고 그랬다. 아마 10월까지 정상적인 생활이 안됐던 걸로 기억한다. 25살부터 지금까지. 어찌보면 20대 중후반이 날아갔으니까. 내게 남은 건 +15kg된 몸무게 뿐이었다. 그 사람과 하려고 했던 버킷리스트 중 못이룬 게 많았는데, 그걸 다 하지 못해 너무 속상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유능하고 잘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싶었다.
두려웠다. 그 사람만큼 좋은 사람을 내가 두번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 사람 정도의 학벌/음악코드/지성미/몸매/궁합 등에 부합하는 사람과 연애가 과연 가능할지. 내 자신이 위축되고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도 시작했고.
#살아남고 싶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따뜻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통이 아닌 사람' 으로 불러주었다. 이미 특정 분야의 관리자/임원 급의 사람들이 내게 한 말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퇴사 후 1년 6개월간의 독서-글쓰기-포스팅을 했을 뿐인데, 그 축적의 시간이 나를 전혀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영어토론 모임에 나가 마음에 들던 여자와 산책을 했다. 6살 연하의 취준생이었다. 먼저 호감을 갖고 다가와준 덕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인연이 닿지않아 사귀는 사이는 아니게 됐지만, 그 사람 덕에 잘 정착할 수 있었다.
독서토론 모임에 나가 여자들과 1대1로 몇번 만났다. 강사로 활동중인 동갑내기는 친해지던 과정에서 내 마음의 상당부분을 힐링시켜 줬다. '거침없이, 날카로운 감정표현은 반사회적이고 독극물이다' 라 여기던 나의 생각을 산산조각 내줬고, 어느새 나의 감정은 이전보다 더 말랑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앱으로도 여자를 만나봤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산MBC에서 현직PD로 활동하던 사람,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복싱하던 사람, 털털하고 쿨하게 다가왔지만 감정적 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직업을 속였던 사람 등. 연락 도중 끊긴 사람들도 수두룩 빽빽하다. 뭐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앱이지 않나. (나도 딱히 '이 사람이다' 느낌받은 사람은 없었고)
한라산도 다녀왔다. 제일 한국에서 올라가기 어렵다는 8시간 30분짜리 코스를 정복했다. 등산경험이라고는 1도 없던 내가 지인들과 함께 장비 단단히 갖추고 한라산을 정복했다. 백록담이 보이는 곳에서 컵라면과 전복김밥을 못 먹은 건 지금도 아쉬운 부분.
신라호텔도 들렀다. 원래 플랜은 전여자친구와 함께 오는 것이었지만, 인생이 어디 생각대로 진행되던가. 어쨌건 그 사람만큼 소중한 대학 지인들과 신라호텔을 그리고 신라호텔 카페를 들렀다. 5성급 호텔은 처음이라던 그녀석들. 그들에게 내 어린시절 추억과 경험을 선물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다.
운동도 시작했다. 연애를 하며 15~20kg가 쪄버린 내 몸무게를 빼야만 했다. 빡세게 등산을 가고, 맨손운동을 시작했으며, 코로나 2.75단계 직후부터는 지인과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집에 들여놓은 턱걸이 기구. 인근에 뛸 수 있는 우레탄트랙까지. 마스크를 쓰고 뛰는 것이 죽을것같이 힘들고 어색했지만 괜찮다. 헤어지면서 느꼈던 그것보다는 덜 아팠으니.
(운동 시작한지 약 3주 지났고, 몸무게는 7kg 가량 감량했다. 허리맞는 바지가 없어 벨트를 매고 있으니..)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많은 생각을 했다.
-'결국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받는 존재구나' 라는 것
-'나라는 사람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존재구나' 라는 것
-연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김백수의 삶' 이구나 라는 것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어버리면, 또 이런 꼴을 당할 수 있겠구나 라는 것
#돌이켜보면..
이번 주 주말에는 소개팅이 잡혀있다. 평소 이성을 보는 눈이 매우 높아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대화 방식/사진/스펙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의 느낌은 '뭔가 프로페셔널 한듯 보이려 노력같지만, 어딘가 헛점이 보이고 실상은 순둥순둥한' 그런 느낌? 자세한 건 만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건 기분좋게 이야기 자리가 잡혔다는 데에 기분이 설렌다.
코로나 시국에 나가서 그러면 생각없다고 누군가가 그럴 수 있겠지만.. 어쩌겠나. 난 사람을 만나서 알아가고 싶은 자유가 있다. 당신에게 피해만 안 주면 그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는 오랜만에 머리도 하고 식단관리도 더 빡세게 진행하려 한다. 후라이드 치킨 한마리 주문? Bullsxit.
참 신기하다. 내 삶에 집중해서 내 세계를 만들어가니,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무뎌졌다. 이전같았으면 전혀 몰랐을 사람과 경험을 접하고, 나 김백수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헤어진 뒤 아무것도 안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자책하며 '재회하는 법' 따위를 찾아봤을테지.
다행히 이제는 아니다. 내가 만든 이 세계에서 나는 최고이고,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나 김백수는 내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가는 주체이며, 이런 나를 못 알아보면 그 사람만 손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약 4년의 시간. 그 사람과 함께해서 다행이고 즐거웠다. 행복했고 풍족했다. 그녀에게서 받은 따뜻한 감정들을 이제는 다른 사람과 나누려 한다.
헤어지던 때도 말했듯.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길에 충실하며 행복할 수 있길.
고마웠고, 사랑했었다.
이제는 정말 후련하게 보내줄 수 있어 기쁘다.
너도 나만큼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2020년 12월 24일
'곰돌이' 김백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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